접을글로 표시한 것들은 추가 설명 및 장준쌤이 재밌게 보신 것들을
페이지 순서로 정리됬으니 시험전 한번씩 꼭 읽어볼 것
이전 배경
제국주의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사람이 하던 일을 기계가 하게 되면서 생산량이 증가 (공급이 증가) 했다.
이후 산업혁명한 국가들이 원재료 공급과 새로운 사장 개척 (수요량 증가)을 위해 대외 팽창을 펼치며
약소국을 식민지로 점령하는 정책을 제국주의라고 한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우수한 인종만이 생존한다는 사회 진화론과
인종적 우월감 등을 바탕으로 약소국 지배를 정당화했다.
독일 제국 수립
한편 유럽에서는 35개의 군주 국가를 하나의 국가로 만든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 세의 총리 비스마르크의 의견을 반영해
<철 혈 통 치>를 시작하였다. ※철 : 군사 / 혈 : 피와 전쟁 / 통치 = 전쟁으로 무력 통치하는 방법
그래서 프로이센은 덴마크,오스트리아·헝가리(1866),프랑스(1870)와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며 1871년 독일 제국이 수립되었다. 이후 독일 제국의 비스마르크는 대외팽창을 하려고 했지만 독일 청년들과 빌헬름 2세를 비롯한 해군력이 막강한 영국,
러시아의 비판으로 대외팽창을 더욱 더 할 수 없었다.
1.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
1-1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다
3국 동맹과 3국 협상
19 세기 초반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 확보를 위해 독일은 프랑스를 고립시키려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와 1882년 3국 동맹을 맺었고 이에 맞서
프랑스와 영국, 러시아가 1907년 3국 협상을 맺었다.
제1차 세계 대전 (161)
제1차 세계 대전은 1914년 세르비아의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한 청년이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헝가리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사건인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게 선전 포고하면서 제 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반에는 삼국 동맹이 우세하였으나, 프랑스와의 교착 상태로 인해 참호전을 양산함으로
전쟁이 장기화 되었고, 러시아의 대량 살상 무기와 총력전으로 전쟁하였지만 러시아는 국내의 혁명을 독일과
단독 강화 회의로 전선을 이탈하였고, 점점 기세가 좋지 않자 독일은 일명 "무한 잠수함 (U-boat) 작전"을 시행하여
상황이 좋아지나 했으나 루시디비아호에 탄 미국인 128명이 사망하는 사건으로 미국 참전하였다.
미국의 참전 이후 3국 협상국이 유리해지자 독일의 동맹국들은 차례로 항복하였고
독일의 새롭게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가 삼국 협상과 미국과 일본을 대상으로
1913년 파리 강화 회의, 베르사유 조약 체결을 끝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은 1918년 마무리되었다.
러시아 혁명 (162)
러시아는 1917년 노동자와 군인들이 전쟁 중지, 차르의 전제 정치 타도를 요구하며 임시 정부를 수립했다
(3월 혁명, 러시아력 2월). 이후 레닌을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이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혁명 정부를 수립했다. (11월 혁명, 러시아력 10월). 이후 레닌이 반혁명 세력과의 내전에서 승리 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소련)을 수립했다(1922). 레닌은 국제 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을 조직 후
각국의 노동 운동과 해방 운동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했다.
전후 처리와 베르사유 체제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전후 처리 문제로 1919년에 열린 파리 강화 회의는
미국 대통령 윌슨의 평화 원칙 14개조에 따라 회의를 진행하기로 했지만,
회의의 결과로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은 가지고 있던 식민지를 잃고 군비를 축소하고
배당금을 지급하였고, 이러한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형성된 국제 질서를 베르사유 체제라고 한다.
한편, 승전국으로 참여한 일본은 독일이 가지고 있었던 산둥반도의 이권을 계승했다(가져가고).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세력이 커지자, 미국은 1921년 워싱턴 회의를 개최하여 일본의 영향력을 축소하고 견제하였다.
장준쌤이 재밌게 본 내용 (p162)
평화원칙 14개조 비밀 외교의 폐지, 군비 축소의 보장, 국제 평화 기구의 창설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식민지에서 주권 문제를 결정할 때 관계 정부의 정당한 요구와
식민지 민중의 이익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며, 이 원칙을 준수하면서 식민지 문제를 공평하게 조정해야 한다는
민족 자결주의 원칙도 담고 있다.
1-2 일제의 무단 통치가 실시되다
헌병 경찰을 통한 무단 통치 (p163)
일제는 식민 통치의 최고 기구로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였고, 현역 육해군 대장 가운데 임명된 조선 총독이 있었고,
조선 총독은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과 군통수권을 가졌다. 총독부의 자문 기관인 중추원을 만들었으나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파로 구성 일제는 지방 행정 조직을 전국을 13도 12부 220군으로 나누었다.
1910대 일제는 헌병 경찰 제도를 바탕으로 강압적인 무단통치를 실시하였다.
구류, 태형, 3개월 이하의 징역 등에 해당하는 범죄에 대해 즉결 심판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 받았다.
장준쌤이 재밌게 본 내용 (p163)
경찰범 처벌 규칙 (1912)
제 1조 다음의 각 호에 해당하는 자는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한다.
제 14조 신청하지 않은 신문 잡지, 기타의 출판물을 배부하고 그 대금을 요구하거나 또는 억지로 그 구독 신청을 요구하는 자
제 19조 함부로 대중을 모아 관공서에 청원 또는 진정을 한 자
제 20조 불온한 연설을 하거나 불온 문서, 도서, 시가(詩歌)를 게시·반포·낭독하거나 큰 소리로 읊는 자
또한 일제는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박탈하였고, 한국인에게는 고등교육의 기회를 거의 부여하지 않았으며 주로 보통 교육과 실업 교육을 실시했다. 하지만 보통 교육도 일본 학생과 달리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6년 교육을 4년만 받을 수 있었다.
즉 똑똑할 필요 없이 일제 통치에 불편함 없이 하기 위해 차별 교육을 실시한 것
토지 조사 사업 실시(1910~1918) (p164)
일제는 1910년 임시 토지 조사국을 설치 후 1912년에 토지 조사령을 공포해 본격적인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하였다.
일제는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다
실질적으로 지세 수입을 늘려 식민지 지배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고,
일본인이 쉽게 토지에 투자할 수 있게 하려는 데 있었다. 토지 조사 사업은 기간 내에 토지 소유권자가
직접 신고하여 소유지로 인정 받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일제는 지주의 소유권만 인정하였다.
하지만 관습상 소작농이 지주에게 소작료만 내면 오랬동안 농사를 지었던 경작권을 부정했다.
토지 조사 사업으로 일본인들과 일부 한국인들이 대지주로 성장했고, 살기 어려워진 농민들은 화전민이 되거나,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이주했다.
화전민이란? 산에 불을 지피고 태워진 자리에 농사를 짖는 백성들 (火田民 = 불 화, 밭 전, 백성 민)
일제의 산업 통제 (p165)
일제는 1910년대 기업 설립을 조선 총독이 허가하도록 하는 회사령을 공포했다.
이는 한국의 기업 설립을 억제하는 것과 일본자본의 무분별한 한국 진출을 통제하려고 만들어졌다.
이후 일제는 어업령(해산물), 산림령(나무, 인삼 등), 조선 광업령(한국광산의 돈 되는 것들) 등을 공포해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일제는 주요 도시와 항구를 연결하는 철도, 도로를 건설하고 정비했다.
장준쌤이 재밌게 본 내용 (p165)
자료 2번 농가의 경작 형태 비육 변화
교과서 그래프 참고
자료 4번 회사령
제1조 회사의 설립은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제5조 회사가 본령이나 혹 본령에 의거하여 발하는 명령과 허가 조건에 위반하거나
또는 공공질서와 선량한 풍속에 반하는 행위를 할 때 조선 초독은 사업의 정지, 지점의 폐쇄 또는 회사의 해산을 명할 수 있다.
1-3 민족 분열 통치가 실시되고 경제 수탈이 확대되다
문화 통치 표방 (p166)
3·1운동을 계기로 일제가 식민 통치 방식을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바뀌었다.
또한 일제는 무관이 아닌 문관도 임명될 있게 하였다.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고 태형 제도와 관리·교원의 제복 착용을 폐지했다. 또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일부 허용되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발간되었다.
문화 통치는 우리민족의 불만을 달래려는 기만적인 술책 즉 기만통치였다.
식민 통치가 끝날 때까지 문관 총독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오히려 치안 유지법을 이용해 감시와 탄압을 강화하고
많은 한국인을 구속하고 경찰 제도를 확대하여 경찰 관서와 인원, 비용 등이 3 ·1운동 이전 보다 크게 증가했다.
민족 분열 정책 실시 (p167)
이후 일본은 지방 자치제를 하는 것처럼 부 ·면 협의회를 민선으로 구성하고 도 평의회를 설치했다.
하지만 이 기구들은 의결권이 없는 자문 기구였을 뿐만 아닌 친일 인사로 구성되었다.
또한 일제는 보통교육 연한을 늘리고 학교를 일부 증설했지만
학교는 턱 없이 부족했고 학비가 비쌌기에 많은 한국인들은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이러한 문화통치는 제한된 자유를 허용하며 일제의 협력자(친일파)를 양성한 반면,
항일 민족을 탄압하는민족분열 정책이었다.
산미 증식 계획 실시(1920~1934) (p168)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일본이 공업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도시에 쌀의 수요가 급증했으나
공업화로 인해 쌀의 공급량이 쌀의 수요를 따라갈 수 없어 쌀 값이 폭등했다.
그러자 일제는 한국에서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하였다. 이로 인해 쌀 생산량은 그다지 늘지 않았지만
일본에 이출(수출)되는 양은 해마다 증가했고, 몰락한 농민들은 화전민,
도시 빈민이 되거나 만주와 연해주, 일본 등지로 이주했다.
일제의 산업 정책 변화
제 1차 세계 대전 때 일본은 공업 제품의 수출로 경제 호황을 누리고
일제의 자본을 축척한 일본 기업이 한국 진출을 위해 1920년 회사 서립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었다.
또한 1923년 한국과 일본 사이의 관세를 폐지하였고, 1928년에는 신은행령을 발표했다.
장준쌤이 재밌게 본 장면(p169)
군산항 1899년에 개항한 군산항은 전통적으로 호남 지방과 충청 지방에서 생산된 쌀이 모이는 곳이었다.
국권 피탈 후 일제는 군산 항을 통해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많은 곡식을 자국으로 보냈다.
한편, 일본 농민드은 군산 일대로 이주항 한국 농민들의 토지를 헐값에 사들여 지주로 성장했다.
2.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2-1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이 전개되다
국내 항일 비밀 결사의 활동 (p171)
국권을 빼앗긴 후 일제는 '남한 대토벌' 작적으로 국내 의병 활도을 위축시켰고,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가 해체되는 등 국내으 독립운동의 탄압이 심해지자
많은 애국지사와 의병 부대가 만주와 연해주 지역으로 이동했다.
또한 국내의 남은 민족 지도자들은 비밀 결사 를 조직해 항일 운동을 이어 나갔다.
국내에는 임병찬을 비롯한 사람들이 고종의 밀지를 받고 국내에서 전국 각지의 유생을 모아 독립 의군부를 조직했다.
이들은 복벽주의 이념에 따라 고종의 복위를 목표로 전국적인 의병을 일이키려 했다.
이들이 국권 반환 요구서를 보내려는 과정에서 일제에 발각되어 해체됬다.
1915년 대구에서 박상진이 대한 광복회를 조직하였다. 대한 광복회는 의병 계열과 애국 계몽 운동 계열이 모여
결성되었다. 군조직을 갖추고 군자금을 모아 무관학교를 세우려고 했고, 친일파 처단 활동을 했다.
조직 해체 후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김좌진 등 일부 회원들이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 독립 투쟁을 계속하였다.
이외에도 교사와 학생들이 기성볼단 자립단 등의 비밀결사 조직했고,
여성들이 주축이 된 송죽회, 미주에 조직된 조선국민회 등이 항일 활동을 벌였다.
독립운동 기지 = 한인 집단 형성 → 자치단체 조직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기지 (p172)
북간도는 용정촌, 명동촌 등 한인 집단을 형성하고 간민회 등의 자치 단체를 만들었고,
이상설, 김약연 등은 서전서숙과 명동학교 등을 세워 민족 교육을 실시했다.
대종교의 신자의 일부가 무장 독립 단체인 중광단을 만들었고,
중광단은 3·1운동 이후 북로군정서로 개편되었고, 사관 연성소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했다.
∴ 중광단 → 북로군정서
대종교 = 단군신화를 믿는 종교
서간도는 신민회가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해는 데 앞장섰서 신민회의 이회영, 이상룡 등은 남만주 삼원보에 신한민촌을 건설하고 이후 경학사를 조직하여 신흥 강습소가 세워졌고, 경학사가 부민단, 한족회로 발전하면서 서로군정서로 개편되었고, 신흥 강습소는 군사 교육을 실시해 독립군을 양성하는 신흥 무관 학교로 발전했다.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기지
연해주 지역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에 한인 집단인 신한촌이 만들어졌고, 자치 단체인 권업회가 조직되어 권업신문을 발간하였으며, 1914년 이상설과 이동휘을 정부통령으로 세우는 대한 광복군 정부가 조직되었다. 이 밖에 연해주에는 전로 한족회 중앙 총회와 이동휘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계열인 한인 사회당을 형성했다.
장준쌤이 재밌게 본 장면(p172)
이회영 형제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8월 초승에 돌아와 여러 형제가 힘을 모아 만주로 갈 준비를 하였다.
비밀리에 논밭과 가옥, 부동산을 팔려고 내놓았는데, 여러집을 동시에 처분하려니 이 얼마나 몹시 어려우리오. · · ·
경술년(1910) 12월 30일에 큰집과 작은집이 압록강을 떠났다. · · ·
여러 형제분은 자리를 못 잡은 여러 동들에께도 5간(間) 집에 1년 지낼 땅과 1년 농사지을 양싞가지도 주어 자리를 잡게 하셨다.
- 이은숙, 『 서간도 시종기 : 우당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 회고록 』
명문가이자 갑부였던 이회영 집안의 6형제는 국권피탈 이후 많을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떠나 독립 운동에 나섰다.
이들은 나만주 삼원보에 신한민촌을 만들고, 신흥 강습소를 세워 무료로 운영하면서 민족 교육과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이회영 형제들은 독립운동을 벌이면서 많은 고초를 격기도 하였다.
다섯째인 이시영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은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숨지거나
생활고를 겪기도 하였으며, 병으로 세상을 떠나기도 하였다. 이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면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높은 사회적 신분에 맞는 도덕적 의무)가 무엇인지 보여 주었다.
미주 지역의 독립 운동 (p173)
1903년 하와이에서도 한인 동포 사회가 형성되었으며
1908년 장인환과 정명윤이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사건을 계기로 1910년 대한인 국민회가 결성되었다.
대한인 국민회는 미국 본토, 하와이, 멕시코와 같은 곳에 지부를 설치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2-2 3·1운동 전개
3·1 운동은 아래 링크 참조
https://injjoy153.tistory.com/entry/수행평가-내용-및-채점-기준표
수행평가 내용 및 채점 기준표
2학년 8반 날짜 10월 2일 7교시에 50분 동안 3·1 운동 소개하기와 가상 편지 쓰기 두 개 다 같이 볼 예정 배경1. 레닌이 식민지에 대한 민족 해방 운동 지원을 선언했다.2. 미국의 윌슨이 민족 자결
injjoy153.tistory.com
2-3 민주 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다
임시 정부의 수립과 통합(p177)
3·1운동으로 임시 정부가 수립하게 되었다.
연해주에서는 전로 한족 중앙 총회를 열어 이를 대한 국민 의회로 개편되었고, 국내에는 13도 대표가 모여
한성정부를 수립했다. 상하이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이 임시 의정원을 만들어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임시 정부는 통합을 논의하였다. 결과로 한성 정부의 각료를 중심으로 연해주와 상하이의 정부를 해산하기로 결정
1919년 9월 상하이에서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이동휘 국무총리로 하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 정부는 민족주의 계열뿐만 아니라 한인 사회당 등 사회주의 계열도 일부 참여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최초로 민주 공화제를 채택하고
삼권분립의 원칙의 따라 임시 의정원(입법), 국무원(행정), 법원(사법)을 구성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활동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연통제와 교통국을 조직하였다. 연통제는 국내의 도·군면에 설치된
즉 지방에 설치된 비밀 행정 조직으로, 정부 문서와 명령 전달, 군자금 조달, 정보 보고 등의 업무를 맡았다.
또한 교통국은 통신 기관으로, 정보의 수집과 분석, 연락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독립 공채를 방행하거나 의연금을 거두었고,
독립신문을 발행했다.
초기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외교 활동이 주력으로 하였고 파리 강화 회의 파견된 김규식이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고 미국에는 구미 위원부를 설치하여 이승만을 중심으로 독립 문제를
국제 여론화 하려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인민 대표 회의에 참석해
소련으로부터 독립운동 지원을 약속 받았다.
한편,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정부 조직에 군무부를 설치하였고,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 등
만주 지역의 독립군 단체가 군무부 산하로 편제 되었다.
국민대표 회의와 임시 정부의 변화
1920년대 연통제와 교통국 조직이 제 기능을 할 수 없었다.
국내에서 독립 자금을 모으기 어럽게 되고, 외교 활동도 강대국의 외면으로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 무렵 다양한 독립 노선의 노선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으며,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계열 간의 갈등도 나타났다.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위임 통치 청원서를 제출한 사실을 문제 삼아 임시 정부의 개편을 요구했다.
국민대표 회의를 개최하였다. 또한 임시 정부는 새로 만들자는 창조파와 조직만 바꾸자는 개조파의 대립이 이어졌고,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마무리리 되었다.
많은 민족 운동가가 임시 정부를 떠나면서 세력이 크게 약해졌다. 1925년 임시 의정원에서는 이승만을 탄핵하고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곧 이어 대통령제를 국무령 중심의 내각 책임제로 바꾸었다.
장준쌤이 재밌게 본 장면 (p179)
국민 대표 회의에서 주장한 독립운동 방안
신채호 : 임시 정부는 처음부터 인적지리적으로 제한된 상하이의 일개 독립운동 단체에 지나치지 않는다.
임시정부를 대체 할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안창호 : 임시 정부를 개선하여 독립운동 단체의 중심 역할 하도록 만들어야 하며,
독립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과 산업 등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
이동휘 : 임시 정부를 개조하고, 많은 한국인이 살고 있는 연해주 지방을 중심으로
항일 무장 투쟁을 적극적으로 수행 해야 한다.
3. 다양한 민족 운동의 전개
3-1 무장 독립 투쟁을 전개하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3·1운동 이후 무장 독립 전쟁의 전쟁의 중요성이 확산되는 가운데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이 국내 진공 작전을 벌이자 일제는 병력을 동원하여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공격했다.
이때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 도독부군,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 등이 연합하여 봉오동 계곡에서 일본군을 공겨가여 승리를 거두었다.(봉오동 전투, 1920)
일제는 일본군이 만제에 진출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중국 마적을 매수하여 이들에게 훈춘 영사관을 습격하도록 하였다. 이 사건을 훈춘 사건이라고 한다.
북로군정서와 대한 독립군 등의 독립군 부대는 청산리 부근으로 집결하여 백운평, 완루구, 어랑촌, 고동하 등 지역에서 일본군과 맞섰다. 이 전쟁은 독립 전쟁에서 가장 큰 승리로 기록되니 이 전투가 청산리 대첩(1920)
독립군의 시련
일분군은 독립군의 지지 기반을 무너뜨리려는 목적으로 간도 지역의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니 이 사건이 (간도 참변) 일본군에 장기 항전을 펼치기 위해 북만주의 미산(밑산)에 모였다.
이후 일부 독립군들은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했고, 독립군 부대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지휘관 자리를 두고 다툼을 했고, 러시아가 독립군의 무장 해제를 강요하면서 독립군이 희생되는 사건을 자유시 참변이라고 한다(1920).
독립군의 재정비
흩어진 조직을 정비하기 위해 노력하여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가 설립되었다.
참의부는 동포사회를 이끌어 가는 민정 조직가 독립군의 훈련 및 작전을 담당하는 군정 조직을 갖추고 또한
행정·입법·사법 일종의 공화주의 자치 정부이다.
민족 유일당 운동과 3부 통합
일제는 1925년 만주 군벌과 미쓰야 협정을 맺어 독립군을 찾아내려 하였다.
이러한 보복에 대한 동포들은 중국에서 시행된 제 1차 국공합작을 보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하려는 민족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었다.
의열 투쟁의 전개
일제 고위 관리를 처단하거나 식민 통치 기관을 파괴하는 방법을 가지고 민증 혁명을 통해 의열 단체가 형성됬다.
1919년 만주 지린성에서 김원봉을 중심으로 결성된 의열단은 신채호가 작성한「조선 혁명 선언」폭력 투쟁을 통한 민증의 직접 혁명을 추구하는 정신을 가지고 활동한 김익상, 김상옥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개인 폭력 투쟁에 한계를 느끼고 조직적인 항일 무장 투쟁으로 노선으로 바꾸었다. 김원봉을 비롯한 사람은 황푸 군관 학교에 입학해 정규 군사 운동을 받고 1930년대 독립군 간부 학교를 설립했다.
3-2 독립을 위해 실력 양성에 힘쓰다
물산 장려 운동
일제에 지배에 벗어나기 위해 실력을 키워야한다고 생각한 이들은
언론을 통한 국민 계몽과 문맹 퇴치 운동, 민립 대학 설립 물산 장려운동 등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대 들어 회사령이 폐지되자 일본 사이에 관세가 철폐된다는 소식에
1920년 조만식 등이 평양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를 조직하여 물산 장려 운동을 시작했다.
물산 장려 운동은 '내 사림 내 것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쉽게 말해서 불매운동을 시전했고
하지만 공급량이 수요량을 따라가지 못해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장준쌤이 재밌게 본 내용(p185)
물산 장려운동 거리 행진
민립 대학 설립 운동
일제가 국권 침탈 후 한국인에게 기초적인 교육의 기회만 제공하자,
한국인의 힘으로 고등 교육을 담당할 대학을 설립하자는 민립 대학 설립 운동으로 이어졌다.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는 '한 민족 1천만이 한 사람이 1원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국적인 모금 활동을 벌였고,
국내를 비롯한 간도와 하와이 등지에서도 전개 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방해와 흉년으로 인한 수금이 어려워지자 큰 성과를 못 이루고 중단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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